본문 바로가기

모읽지 "Book"/요즘 모읽지?

<공항에서 일주일을> 억눌린 알랭 드 보통의 공항 이야기




알랭 드 보통이 히드로 공항에 눌러 앉아 글을 썼다. 그가 머문 기간은 1주일. 공항 옆 호텔에 숙소를 잡고 공항 라운지 한 켠에 책상을 들여 놓아 작업을 했다. 물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런던의 유명 작가를 몰라보았을 리 없다. 언급 되진 않았지만 영국 사람 뿐 아니라, 세계 각 국의 사람들이 알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작가의 새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작가의 철학적 통찰력을 빌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거나 자신의 이력에 알랭 드 보통의 책에 나왔음을 넣어보려 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은 그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그들과 그들이 방문하거나 상주하고 있는 공항의 이야기에 쏟았다.


그의 책은 작년에 정이현과 함께 출간한 소설을 마지막으로 읽지 않았다. 그를 유명인의 반열에 올린 소설들은 모두 읽었고, 다른 사람들에 지지 않을 만큼 그의 글을 좋아했다.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 해도 그의 글은 조금 더 철학적이고 섬세하며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소설은 내가 오랜만에 그의 글을 읽게 되며 그 사이 취향이 바뀌었는지, 그가 이 책에 담은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이유는 모호하지만 예전 만큼의 감흥을 얻지 못했다. 내가 강렬하게 받았던 낯선 히드로 공항의 이미지와 이미 익숙한 그의 히드로 공항의 이미지는 꽤 차이가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묘사하는 공항은 히드로 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공항에 대한 이야기이겠지만, 편의상 내게 익숙한 인천공항을 떠올리며 읽게 되곤 했다.


공감의 부족은 경험의 부족이거나 상상의 부족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부족한 부분들이 전적인 이유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책임은 알랭 드 보통에게도 나눠야 공평할 것 같다. 일주일 간의 관찰 일기를 책 한 권으로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소재가 너무 한정적이다. 그가 쓴 이야기는 내가 책을 읽기 전 예상했던 부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뻔한 이야기를 얼마나 알랭 드 보통의 시선으로 그의 느낌을 입혀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을 텐데, 애초에 제의를 받아 쓴 글인 만큼 눈치를 보며 쓴 느낌이 없지 않다. 공항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가 하다가도 마무리는 교과서적인 감상으로 마무리 됐다. 이런 왜인지 억눌린 듯한 태도가 글 전반에 배어 있어서 그의 재치가 비교적 덜 드러난 것 같다. 역시 자발적일 때 역량이 발휘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걸까.


혼돈과 불규칙성이 가득한 세계에서 터미널은 우아함과 논리가 지배하는 훌륭하고 흥미로운 피난처로 보인다. 공항 터미널은 현대 문화의 상상력이 넘쳐나는 중심이다. (16쪽)


부자일수록 짐이 적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지위와 주로 다니는 여행지 덕분에 이제는 어디에서나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눈에 자주 띄는 경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43쪽)


객관적으로 일하기 좋은 곳이 실제로도 좋은 곳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조용하고 시설이 잘 갖추어진 서재는 그 흠 하나 없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실패에 대한 공포를 압도적인 수준으로 높이곤 한다. 독창적인 사고는 수줍은 동물과 비슷하다. 그런 동물이 굴에서 달려나오게 하려면 때로는 다른 방향, 혼잡한 거리나 터미널 같은 곳을 보고 있어야 한다. (77쪽)


기내식은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테크놀로지에 의존한 것과 유기적인 것 사이에 최대의 긴장이 이루어지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1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