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을 따라 우주를 떠다니며 언젠가 마주할 미지의 적을 찾아 전쟁을 준비하는 궤도연합군. 우주 태생인 '나'는 운 좋게 작전장교로 부임하게 되고, 여섯 번의 전투를 거쳐 더 먼 여정을 떠나게 된다. 우주 공간처럼 널찍한 여백을 두며 만들어진 이 책은 '나'가 지구에 있는 연인에게 보내는 청혼의 편지를 담고 있다. '나'의 청혼은 그의 눈에 비친 우주를 우리의 눈에도 그릴 수 있게 해준다. 고요하고 막막하지만 아름다운 우주. '나'의 묘사는 거대한 폭발로 군사들의 생이 끊어지는 순간 마저 최고로 아름다운 빛의 퍼레이드로 만든다. 그가 그리고 있듯 숭고함 그 자체인 우주에 비해 지구의 존재는 얼마나 작으며, 인간이 아직 알지 못하는 우주의 법칙은 얼마나 인간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인가. 이 소설은 우주에 대한 숭배에 가깝다.
'나'와 그의 연인은 신카이 마코토의 <별의 목소리>와 유사하게, 지구 표면과 우주 어느 지점 사이 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의 거리는 메시지 하나를 보내도 17분이 걸리고, 한 번 만나기 위해서는 왕복 3백 시간 이상을 우주에 쏟아부어야 한다. 이들은 인스턴트 메시지의 재빠른 수신 확인과 회신에 안달내는 오늘의 연인들에게 연민 혹은 귀감의 대상이다. 무한에 가깝게 느껴질 이들의 기다림은 궁극의 갑갑함과 불안함을 가져다 줄 테지만, 그만큼의 기다림이 이들의 애정을 더 진지하고 소중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보통의 연인이라면 금세 마쳤을 일들을 며칠 씩 공을 들여 준비하고 차분하게 행동한다. 얼마 없는 표현의 기회를 낭비 없이 쓰려 하는 덕에 말 한 마디에서도 신중함과 애틋함이 느껴진다. 이들 만큼의 거리를 두지 않고도 이들처럼 알뜰살뜰하게 감정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다면 얼마나 평화로울까 싶다.
오랜만에 접하는 낯간지러운 고백들도 이 청혼의 편지를 통해 보면 이만큼 낭만적일 수가 없다. 우주 한복판에서 보내오는 우주식 사랑의 문장이라니. 최첨단 무기를 장착하고 최신 기술과 가장 트렌디한 디자인을 갖춘 우주선에 탑승한 우주인이 보내는 사랑의 편지가 가장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준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이러니고, 그래서 더 감동적으로 와닿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런 간절하고 애틋한 말을 들어본 적이 까마득하기에 더 설레며 읽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타이밍이었는지, 글의 분위기였는지, 마음이 동한 이유를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 저마다 얼마 만큼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우주에 둥둥 떠 있는 상상을 하면서 읽어서일까, 왠지 몽롱하다.
그때, 내 인생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금쪽같은 휴가를 받자마자 170시간을 날아가서 40시간 동안 너와 함께한 다음 다시 180시간을 날아서 복귀하는 나를 보고, 후회되지 않느냐고 네가 물었지. 후회하지 않아. 한 번 더 휴가가 생긴대도 또 그렇게 할 거야. (57쪽)
우주공간에 떠 있는 일이 늘 조난당한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주위의 빈 공간에 비해 우리가 차지하는 공간이 너무나 작기 때문이야. 지구만 한 공간에 우주선 딱 한 대니까. 조난. 그래, 그건 조난이야. 무언가에 깊숙이 잠겨버리고 만다는 뜻이야. 어둡고 고요하며 거대하고 또 막막한 무언가. (93쪽)
그건 정말 현실감 없는 싸움이었어. 소리라도 들렸으면 좀 달랐을 텐데, 우주에는 대기가 없어서 밖에서 아무리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도 이 안은 그저 고요하기만 하거든. 아무 예고도 없이, 별 긴장도 느끼지 못한 채, 나도 모르게 삶과 죽음이 갈라지는 거야. (101~102쪽)
찾아왔다. 네가 그렇게 말했어. 지구에서 거기까지, 그렇게 먼 거리를 건너 나를 만나러 왔다고. 정직하게, 공간의 벽 어딘가를 건너뛰는 일 없이 단 1킬로미터씩 혹은 단 1미터씩이라도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좁혀서 정직하게. (162쪽)
고향이 생겼어. 네가 있는 그곳에.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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