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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읽지 "Book"/요즘 모읽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믿을 수 없는 기억과 지나쳐버린 책임에 대해




제목과 반대로 주인공 토니도 좀체 자신의 삶을 코앞의 것까지 예감하지 못하는데, 나 역시 그러하다. 작년의 베스트셀러를 고이고이 묵혀두었다가 인기가 뜸할 즈음 읽어야지 하곤 잊어버려서 계획 아닌 계획을 이제야 실천했는데, 왜인지 주변에서 이 책 얘기가 많았다. 심지어 회사에서도 과장님이 지인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추천을 했는데 나도 읽고 있는 거냐며 신기해 했다. 사실 워낙 인기가 좋았던 책이니 여전히 많이 거론되고 있는가보다 생각했는데, 범인은 '빨간 책방'이었나보다. 글감을 첨부하다가 혹시나 하여 슬쩍 들여다보니 최근 빨간 책방에서 소개한 모양이다. 성수기를 피해 읽고 싶었는데, 지금이 또 성수기라니.


그렇다고 크게 아쉬울 것도 없고, 내가 미처 예감하지 못한 것들은 토니에 비하면 극히 사소해서 안색을 바꾸는 것조차 민망하다. 자신의 아래로 2대를 더 이은 노년의 토니는 열 여섯 시절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부터 자신의 삶을 돌이켜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의 기억에 기대어 서술한다. 애써 속이려들지도 않고 솔직하게 최대한 신중을 기해가며 낱낱이 자신의 삶을 털어 놓는다. 크고 작은 일들의 고백을 하나 둘 이어가고, 최근의 기억까지 불러 들이는 토니. 그는 이제 현재의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그리고 그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이며, 왜곡된 것인지 고통스럽게 깨닫게 된다.


인간의 기억에 대해서는 믿을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는 한 최대한 믿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토니의 말처럼 순탄하게 인생을 사는 데에 그런 것을 기억하는 것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기억하는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이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 방법일 것이기에, 기억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무시해버리고 만다. 이 소설에서는 기억의 왜곡을 토니가 스스로 보냈다고 믿는 편지의 내용과 오랜 세월이 흘러 돌려 받은 편지의 실제 내용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마도 그가 자신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자기보호 본능' 때문에 기억을 바꾸었을 것이다.


기억을 달리 저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기억 너머의 진실이 누군가에게 남겼을 상처와, 그 상처를 낸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제대로 된 기억과 함께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기억을 도려내고 덧칠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인간이 발전시켜 온 기술일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평생을 짊어질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는데, 진실의 기억을 지워버린다면 책임을 질 사람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상처는 대개 상호적으로 가해지는 것이겠지만, 책임을 나누지 않고 한 쪽이 도망쳐버린다면 영원히 아물지 못할 것이다.


줄리언 반스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책들은 까다로워 보여 쉽게 접할 수가 없었다. 이 소설 역시 자조적 유머를 버리지는 않지만 자살과 관계의 책임, 기억과 역사라는 주제에 대한 철학적 진지함을 끌어나가고 있다. 또 화자인 토니의 생각이 불필요한 부분은 없지만 흐름상 꽤 중구난방인 감이 있다. 아마 난감한 번역체가 일조했으리라 생각은 들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의 다른 책이 읽고 싶어질 만큼 매력적인 소설이다. 노년에 삶을 돌아보는 것을 읽는 것만으로도 꽤 의미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삶의 굉장한 허무가, 또 어떤 면에서는 낱알 하나도 버릴 수 없는 가치가 느껴진다. 이도 저도 아닌 느낌 아니냐고 묻는다면, 이게 인생의, 인류의 역사의 모습 아닐까 어렴풋하게 짐작해본다.



훌륭한 문학작품을 읽은 덕에 우리는 '사랑'엔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사랑이 찾아왔는지도 모른다는 암시적인, 어쩌면 논리적이기까지 한 징후를 분명히 감지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고통'을 실제로 겪어내려 했을 것이다. (30쪽)


"하지만 사람이 너무 똑똑하면, 마음이 해이해질 때 고삐를 풀어버리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87쪽)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101쪽)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예를 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기억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다 한들 뭔가가 편리해지지도 않고, 뭔가에 소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을 순탄하게 살아가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무시해버린다. (111~112쪽)


한 번 상처를 받으면, 두 번째에도 상처받는다. (205쪽)


누가 말했던가? 살면 살수록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점점 사라져만 간다고. (2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