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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볼까 "Movie"/요즘 모볼까?

<더 울버린> 다음 엑스맨으로 만날 땐 이러지 말아요




마블이라고 해도 어설픈 영화가 한두 가지는 아니다. <그린 랜턴>의 악몽을 지울 수 없는 DC는 말할 것도 없다. 어디 소속이든 적지 않은 히어로물을 보며 의무감으로 끝까지 보기 어려울 정도의 유치함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단독 캐릭터를 위한 영화들이었고 큰 불만은 없었는데, 울버린의 경우는 다소 의외다. 영화로는 <엑스맨 탄생: 울버린> 때문에 스토리가 뒤죽박죽이 되긴 했지만, 그만하면 수작이었고 또 그만큼의 인기를 얻은 엑스맨 시리즈를 통해 만나지 않았던가. 필연적으로 이번 <더 울버린>에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번 울버린은 꽤 실망스럽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수두룩하지만 무엇보다 개연성이 너무 부족하다.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없고 대사들의 의미가 딱히 흐름을 잇지 못한다. 방황하던 울버린이 내면의 혼란을 딛고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표현해야 하는 영화인 것 같은데, 악몽 꾸던 마리코가 회사를 잘 운영하게 되는 걸 말하려는 건지, 애비와 할애비가 선보이는 막장 드라마를 보여주고 싶은 건지 중구난방이다. 원작 내용이 토대이긴 하지만, 멀쩡한 이야기를 헤집어 놓은 느낌이랄까. '로닌(주인 없는 사무라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쿠주리(짐승)'이라고 부르는 것도, 일본 문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것도, 저것도, 타이밍이 너무 뜬금포다. 울버린이 마리코와 하룻밤 자고 나서 '공주님' 타령을 하는 건 어울리지도 않게 <로마의 휴일>을 패러디한 건가.


하룻밤 말이 나와 말인데, 마리코는 원작에서 진보다 울버린과 더 가까운 사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진은 미저리같이 꿈에 나와 미친 존재감을 보여주는데, 거의 <어나더 어스>의 누나급이다. 침대에서 야시시한 슬립 입고 풀화장까지 해서 자꾸 나타나는 진 언니. 다섯 번째쯤 나올 때엔 헛웃음이 나오더라. 아무튼 원작을 떠나 여기서 마리코와의 로맨틱한 장면들은 죄다 공감이 안 된다. 울버린의 치명적인 매력을 거부할 수는 없었겠지만 사랑에 빠지는 시점이 너무 오묘하다. 두 사람의 케미도 도저히 몰입할 수 없는 지경. 아이유였다가 이진이었다가 웬 일본의 기아상태 모델이 되는 마리코는 밑도 끝도 없이 어색하다. 결정적으로 진이 누구냐며 집요하게 묻는 모습에 정이 뚝 떨어진다.


울버린 캐릭터 자체가 와패니즘 성향이 짙어서, 영화에서도 다다미 냄새가 풍기겠구나 했는데 그 부분은 예상보다 덜했다. 따지고 보면 일본 유수의 전통을 중시하는 가문의 막장을 보여주고 있어 굳이 끼워 맞추면 일본 비하가 될 수도 있겠다. 거북했던 것은 와패니즘이 아니라 꾸민 티가 많이 나는 연출들이었다. 하라다가 지붕 위에 올라 걸어다니는 모습이라든지, 울버린에게 화살을 쏘아 줄줄이 맞춰 놓은 모습이라든지, 관객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신경 쓴 컷들이 눈에 훤히 보였는다. 촌스러운 영상과 지루하고 뚝뚝 끊기는 전개는 무엇이 무엇의 원인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더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었던 와패니즘을 본의 아니게 표현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놀라운 연출이다.


마블 영화 답게 엔딩 크레딧 후 쿠키 영상이 있다. 물론 재미야 없었겠지만 '나 지금 끝낼거야' 라고 3분 전부터 타이밍 노리다 올라온 엔딩 크레딧을 보자마자, 우르르 썰물처럼 밀려나가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쓰렸다. 쿠키 영상이 제일 긴장감 있고 재밌었던 것 같은데 그걸 놓치고 가다니! 브라이언 싱어를 앞세워 내년 개봉이 확정됐다는 엑스맨 다음 편에 대한 예고 영상이니, 이 혹평을 보고도 나처럼 '마블이니까'와 같은 맹목적적인 이유를 대고 가는 분들은 꼭 보고 나오길 바란다. 아마 그런 이유로 간 정도라면 짚어주지 않아도 알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빨리 나가고 싶어서 잊어버릴 수도 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