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어 윌 비 블러드>의 기억은 섬뜩한 인간성의 묘사, 그에 대한 문학적인 연출과 소름 돋는 연기 정도로 남아 있다. 그것을 내놓았던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이라는 사실은 보고 싶어 안달이 나게 하면서도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어떤 장벽 같은 것을 마련하고 있었다. 마침 씨네코드 선재에서 보기로 한 <빈센트>의 앞뒤로 <마스터>가 상영예정이었기에, 우연 반 필연 반으로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용기 있는 선택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듯, 영화관에서 특별 이벤트로 입장 관객에게 <마스터>의 오리지널 포스터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팸플릿에 사용된 바다색 포스터는 아니고 백사장색의 포스터였다.
상처 받은 과거와 상처 준 과거로 가득 차서 틀어진 내면의 프레디, 기댈 곳 없이 떠돌다 사이언톨로지 교주에게 빠져드는 프레디가 자신과 다를 바 없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프레디의 면면은 보통의 사람들이 지닌 약점의 극단적 형태와 다르지 않다. 멘토를 찾아 헤매는 우리 시대의 현실을 보아도 그렇다. 보통의 경우 멘토에게 좋은 영향을 받고 자신의 길을 찾는 도움을 얻을 수 있겠지만, 자기 스스로 일어날 힘이 지나치게 부족한 사람에게 멘토는 그 사람을 더욱 나약하고 의존적으로 만들 뿐이다. 프레디의 마스터처럼.
사실 영화 속 마스터인 랭케스터는 좋은 멘토도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프레디를 다시 상처 입게 만들고 만다. 종교적 단체의 마스터로 사람들에게 허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자신을 포장하기에 급급하지만, 실상은 프레디의 알콜에 중독된 데다 자신이 쌓은 성곽이 공격 받으면 이성을 잃는 특별할 것 없는 인간인 것이다. 그가 프레디를 돕고자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이론에 입각한 치료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또 하나의 자기 포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또 랭케스터에게 프레디는 유일하게 포장지 안의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결국 그 역시 프레디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프레디가 누군가의 마스터가 되는 모습도 보여주기도 하듯, 절대적인 마스터가 있을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 프레디와 랭케스터는 그저 상호보완의 관계를 유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메소드 연기를 보여준 호아킨 피닉스 때문에 이 영화의 프레디, 프레디가 있는 이 영화의 인상이 너무나 강렬하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불안을 안고 있는 캐릭터여서 보는 내내 마음을 졸이게 한다. 한 쪽만 올라간 입꼬리, 툭 내려 앉은 어깨, 굽어버린 등과 중심을 잡지 못하는 걸음걸이. 이 모든 것이 그의 신들린 연기에서 만들어진 캐릭터라는 것을, 그의 다른 연기를 보지 않은 사람은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이다. 상반신에 집중되어 인물의 표정 하나하나에 빠져드는 앵글이며, 매 순간을 들었다 놓는 사운드의 효과도 영화의 맛을 더한다. 포스터는 영화를 보고 나서, 그리고 곱씹을 수록 더 애착이 가서, 사무실 벽에 붙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마스터에 의존하는 프레디처럼 나약해지고 싶진 않으니까. 아무래도 한 번으로는 맛을 다 보지 못한 것 같아 한 번, 시간의 텀을 두고 또 다시 한 번은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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