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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읽지 "Book"/요즘 모읽지?

<겨울밤 0시 5분> 나이 든 시인의 눈으로 삶의 기쁨을 보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7. 17.




겨울밤에 읽어야지 하고 샀던 것이 2년 전이다. 출간된지는 4년이니 참 오래도 묵혔다가 읽는 시집이다. 올해 초 나온 시인의 <사는 기쁨>도 출간 되자마자 사두었었는데 이건 또 언제나 읽게 되려나. 피서를 해보려던 것은 딱히 아니었는데 시를 좀 읽고 싶다 하여 책장에서 골라든 책이 이것이었고, 여름을 지낸 후 가을과 겨울의 자연을 그린 시가 많았다. 읽는 이의 방 안 공기를 몇 개의 시어로 서늘하게 만드는 황동규 시인의 섬세하고 생생한 묘사 덕에, 별로 공들이는 것 없이 넉넉한 피서를 할 수 있었다.


올해로 일흔 여섯을 맞았을 시인은, 이 시들을 쓰던 당시에도 고희를 넘긴 노인이었다. 그가 노년에 바라보는 세상과 노년에 느끼는 삶은 50년이나 어린 눈을 가진 내 입장에서 어떠한 절묘한 시어들로 표현한다 한들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는 정도를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시를 읽으면 그 기대의 절반 정도에 닿는 것 같다. 절절하게 와닿지는 않지만, 나와는 다른 시각, 아마도 더 깊은 시각에서 삶을 관찰하는 그의 삶을 통해, 내 삶도 얼마나 활기차고 감동적일 수 있는지 느끼게 된다.


요즈음 케이블에서 방영을 시작한 예능 중, 시인과 연배가 같은 배우들이 그들에 비해 새파랗게 어린 40대 청년 배우와 유럽 여행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나이 들면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해오던 노동에 가까운 여행을 네 명의 어르신이 즐기는 것을 보니, 나이라는 게 약간의 불편 정도에 그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여행의 감상이 철 없는 청춘의 여행보다 더 진해보이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시인이 정제한 시들 또한 젊은 작가들이 주지 못하는, 어린 나의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이 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22쪽, '겨울밤 0시 5분')


언젠가 이런 편지 쓰는 일마저 싫증나면
마음 한가운데 생짜 공터가 생기리라는 생각이
마음 설레게 합니다. (95쪽,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편지')


여름내 속으로 미워한 자 하나
내처 미워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지.
그 할까 말까가 바로 피 말리는 일,
아예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 미워하든가
마음에서 슬쩍 지워버리는 거야.
아니면 어느샌가 바위의 따스함이 그리워지는 저녁,
바위의 피부를 간질이는 가벼운 햇볕,
볕이 춤춰, 하면 드리워진 글미자처럼 가만히 춤추다가
생판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한번 헛헛하게 웃든가? (113쪽, '헛헛한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