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은 나를 괴롭히는 대상 중 하나다. 헌책은 불필요한 생산 과잉을 줄여 지구의 생존에 도움이 되고, 이러한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적 나눔을 실현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나는 이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실천하고자 책을 나누는 일을 행동에 옮기는 것은 물론, 알라딘 중고서점이 서비스를 시작하기 이전에 헌책을 공유할 수 있는 웹사이트의 기획 단계에 착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책으로만 채운 몇 개의 트럭이 그분의 이삿짐이었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를 들며, 자신이 읽었던 책은 소장하고 있어야 그 가치를 잊지 않을 수 있다는 어머니의 만류에 내가 가진 책을 누군가에게 준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지만, 어쨌건 일종의 딜레마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타인이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도 특유의 결벽증 때문에 쉽지가 않다. 돈이 없던 학생 시절에는 서점에서 마음껏 책을 사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잘 구비된 도서관들에 감사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와중에도 특히 오래된 책이 많은 학교 도서관에서는 언제나 티슈로 몇 번씩 책의 겉면을 상하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닦아내야 겨우 읽을 수 있었다. 당시 읽고 싶은 책이 딱히 없는 날은 깨끗한 새로 들어온 책을 골라 보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헌책방에서 책을 구입하는 일은 내게 너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실제로 청계천은 물론, 종로의 알라딘 중고서점에도 큰맘 먹고 가보았지만, 결국 한 권도 얻지 못하고 돌아왔었다.
이 책을 엮고 담백한 소견을 적어놓은 저자도 헌책의 가치를 깊게 느끼는 헌책방의 주인이고, 이 책에 추천사를 남긴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같고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 책의 실제 주인공인 책들의 이름 모를 옛 주인들 또한 크게 다른 의견을 갖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몇 십년 전에 적힌, 대개 나의 부모님 세대의 어른들이 내 나이 대에 적어 놓은 솔직한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진지하고 뭉클하다. 적어도 그 시대의 청춘은 오늘의 내 주변보다 시대에 임하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책을 읽는 이들이어서일까, 심지어 연애를 걸어도 더 진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헌책방에서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고양이 알레르기 환자가 되는 기분이다. 소박하지만 저마다 진지한 이야기들, 누군가에게 간절히 닿고 싶어하는 마음들, 일기보다는 더 특별하게 담긴 고백들, 그리고 흐르는 세월이 그들에게 더해준 시대적 가치들. 굳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해보지 않아도 바랜 색과 닳아버린 귀퉁이로 느낄 수 있다. 그야말로 아날로그적 가치가 꼼꼼하게 밴 공간이다. 이러한 감동을 느끼면서도 정작 또 하나의 이야기를 더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 그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참 답답하다. 따지고보면 새것과 구분이 안 될 만큼 깨끗한 상태로 읽으며 날짜 하나라도 적는 것을 꺼려하니, 나는 그들과 함께할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지도 못한 셈이기는 하다. 대신 몇 달 전부터 계획중인 1년 이내에 진행할 대규모의 책나눔을 꼭 실천해겠다고 다시 다짐해 본다.
책 속에 남긴 문장이 편지이건 사랑고백이건 내가 보기에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 내용이 모두 너무도 솔직하고 진심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때론 아주 짧은 문장을 보고서도 그 글씨를 쓴 사람에게 이끌려 깊은 상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경험을 한 적도 많다. 책 속에 글씨를 남긴 사람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일은 셀 수도 없이 많다. (16쪽)
센티멘탈도 세월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 (53쪽)
많은 사람들이 그가 너무 변했다고, 사상적으로 변질됐다고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오롯이 그의 길이다. 그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타박타박 흙길을 걸어가는 그 자신이 유일할 것이다. (81쪽)
누구라도 연인에게서 받는 편지는 손글씨이길 바란다. 이것이 바로 종이책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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