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앉아 있는 게 주리트는 것 같았던 건 오랜만이다. 기대했던 길예르모 델 토로의 감각적이고 선명한 연출은 보이지 않았다. 거대자본 앞에서 그도 소신을 지키긴 어려웠던 건지, 갑자기 그가 스타일의 변화를 시도한 건지 모르겠지만, 적잖이 당황스럽다. 컷 전환도 어색했고, 굳이 필요 없을 듯한 장면도 불필요하게 많았다. 전개되는 수준이 딱 애들 여름방학맞이 특선영화였다. 마침 옆 자리에 초딩인지 중딩인지 분간이 안 되는 남자애 둘이 앉아 있었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고로 고로 고로 흠흠 고로 고로-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짜증스러운 건 틱을 앓는지 천식을 앓는지 알 수 없는 소년으로부터의 잡음이 아니라 얘들마저도 지루해서 저희들끼리 잡담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스케일과 로봇 CG의 수준은 놀랍지만, 그것뿐이라는 것이 치명적이다. 특히 다른 부분들을 포기하고 특수시각효과에만 심혈을 기울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3D는 멋지다. 이것도 어둠 속에서만 빛나는, 날 밝을 때는 아쉬운 디테일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다른 부분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고퀄리티다.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스토리와 전개, 누구나 쓸 수 있을 대사, 이연희급 연기로 엉덩이는 배기고 손발은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외계 괴수 카이저의 외모는 공룡과 에일리언의 결합에 불과하다. 다양한 생김새가 나오긴 했지만 신선하거나 압도적이진 않았다. 로봇 디자인을 열심히 하긴 했겠지만 이미 트랜스포머의 기능과 아름다움에 매료됐던 이에게 크기만 한 예거들은 어필할 수가 없다. 그저 '리얼 스틸'의 진화일 뿐.
뭐니뭐니해도 최악은 캐스팅과 연기력이 아닐 수 없다. 카이저 장기밀매상인 한니발을 분한 론 펄먼을 제외하고는 연기력의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특히 키쿠치 린코의 연기는 보고 있기가 부끄러웠다. 왠지 낯익다 해서 필모를 뒤져보니 <바벨>에 나왔단다. 여우조연상까지 받았었네. 이제야 생각난다. 클럽에서 Semtember에 맞춰 춤추던 그 고딩. 거기서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동양 여배우의 영어 연기로는 본 것 중 역대 최악이다. 표정이며 몸짓이며 모든 것이 어설프다. 필모가 쌓인 배우라고는 생각도 못할 만큼 충격적인 연기력이다. 배우로서의 노력도 부족해 보인다. 무술을 하는 데 이렇게 허접한 액션을 보여주는 여배우는 근래 본 적이 없다. 운동이라고는 한 번도 안 해본 듯한 몸에 어색한 손짓과 여중생 같은 샐쭉한 표정은 밉상의 끝. 이건 좀 과한 힐난이긴 하지만, 남주보다 얼굴이 큰 여주라니. 개인적으로는 이것도 몰입을 해치는 부분이었다.
기대했던 영화지만, 예고편을 보고 깔끔히 극장행을 포기했었다. 그리고 오늘 본의 아니게 회사에서 팀 회식을 하게 되며 결국은 개봉일에 보게 됐다. 좋은 볼거리이기는 했지만 기대를 하고 갔으면 실망이 훨씬 컸을 것 같다. 보는 동안 꽤 생각나던 <배틀쉽>도 관객에게는 그리 버림 받지 않았던 점을 볼 때, 이번에 캐스팅만 잘 됐어도 중박은 쳤을 텐데. 이번엔 누가 봐도 실소가 나올 만한 연기여서 안타깝다. 길예르모 델 토로의 차기작인 <크림슨 픽>은 듣자하니 스토리도 그의 스타일에 잘 맞는 듯하고, 배우진도 찰리 헌냄을 또다시 기용하긴 했지만 대부분이 이미 초대박급이라 다시 한 번 그편에 기대를 걸어봐야 할 것 같다.
'모볼까 "Movie" > 요즘 모볼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스터> 감히 누가 누구를 섬기게 하는가 (0) | 2013.07.14 |
---|---|
<빈센트: 이탈리아 바다를 찾아> 그에게 필요했던 건 위로와 애정, 그리고 자유였다 (0) | 2013.07.14 |
그 동안 보았던 공포 영화들 보다 참신했던< 무서운 이야기2 - 탈출> (3) | 2013.07.10 |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 보고 싶어도 쉽게 볼 수가 없어 화가 난다 (0) | 2013.07.07 |
<월드워z>후기 - 오락 영화로는 최고, 감흥은 별로.. (0) | 2013.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