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극장에서 블록버스터 영화만 보니 감성이 메말라 가는 느낌이 심하게 들었다. 새벽에 배에 노트북 얹고 영화 보던 취미는 본 직후 당장 기록해놓아야 하는 성격을 감안하면, 쪽잠이라도 자기 바쁜 직장인 신분에 누릴 수 없는 사치.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작정하고 잔잔한 유럽영화를 보기로 했다. CGV 무비꼴라쥬는 블록버스터에 밀리기 쉬운 비장르영화들을 상영해주는 프로그램으로, 잉여시절에 감사해하며 달려가 보곤 했던 것이다. 왠지 시간이 남아도는 내 처지가 문화를 향유하기 위한 예술영화 애호가의 필수요건인 것만 같고, 소외된 곳에도 시선을 돌려주는 따뜻한 대기업이라며 일종의 정의 비슷한 것도 느끼곤 했다.
물론 그건 허세시절의 자기합리화지만, 상황이 바뀐 뒤 그 생각이 나름 일리 있는 것이었음을 알게 됐다. 평일 조조는 고사하고 주말에 무비꼴라쥬를 이용하려고 보니 원하는 영화는 자정 가까운 시각에 가야 볼 수 있는가하면 아예 주말에는 상영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실 개봉 전부터 더 보고 싶었던 건 <빈센트>였는데 개봉 2주째 주말임에도 서울 딱 한 곳에서 밤 10시 넘어서만 하더라. 이런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정말 우리나라뿐만의 문제는 아닐 테지만, 거대자본이 개입된 빵빵 터지는 영화가 아니고서는 극장에서 본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서울이 이러한데 지방도시의 경우에는 도대체 상황이 얼마나 심하단 것인가.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꽤 있었던 예술영화 전문 상영관도 사라지는 추세인 데다, 예술영화관이라는 이름을 달아도 피크타임에는 대중적 인기가 검증된 영화를 상영하곤 하니, 숨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들도 DVD로도 별로 찍어내지도 않고 도서관에서마저 구하기 어렵다.
겨우 찾아낸 주말 오후의 영화관이 압구정 CGV라는 것은 왠지 아이러니. 대학로점도 무비꼴라쥬에 큰 중점을 두고 있는데, 그곳이야 대학가니 그렇다 치고 이 더위에도 마스크로 얼굴을 뒤덮고 온갖 보형물로 얼굴을 변형시킨 여자들이 가득한 압구정점에서 비장르영화를 열심히 상영하게 된 이유가 뭘까. 할머니와 장애가 있는 청년이 스탭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오래된 부촌인만큼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소득수준이 높을 수록 대중문화와는 거리가 있는 것을 향유하려 한다는 점이 원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런 편중현상을 통해 어쩔 수 없이 기업은 돈벌이 수단으로서 영화관을 만들 뿐, 영화에 대한 애정이 있거나 영화 팬들을 위한 사회적 역할을 하려는 노력이 충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나마 CJ의 무비꼴라쥬를 믿었건만, 여전히 불편이 많이 따른다. 아니! 좋아하지도 않는 압구정에 영화 한 편 보자고 가야되냔 말이지. (아, 결론은 이것.)
영화팬의 노파심을 불러일으킨 상영정보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영화관은 만석이었다. 예전에 평일 조조를 볼 때면 10명도 되지 않는 관객과 함께 영화를 봐야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기 때문. 아마 그런 상황이 이 지경으로 만들긴 했겠지만, 그건 좋은 영화를 알리지 못한 누군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흠흠. 이 영화도 충분히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에 견줄 만한 매력이 있다. 진지하고 엄숙한 내용마저 방정맞다 싶을 만큼 코믹하게 보여주는 프랑스 영화의 흔한 특징은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예술가의 삶에 사랑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아름다운 음악과 환상적이고 아기자기한 다양한 연출로 표현한 점도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몇 해 전 <엔젤-A>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던 자멜 드부즈가 1인 2역으로 감초역할을 하며 등장하는 것도 개인적으로 무척 반가웠다. 대중적인 관심을 지대하게 받는 영화들에 비해 무엇이 더 좋은 영화라고 말하기엔 너무 '다른' 영화이며, 분명 취향의 문제와 엮이게 되므로 가름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비롯한 유럽영화들로 대표할 만한 비장르영화들이 뻔한 전개와 예상할 만한 연출을 벗어난 새로운 표현으로서의 영화를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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