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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읽지 "Book"/요즘 모읽지?

<들살림 월령가> 시골 살림을 꿈꾸게 하는 싱그러운 기록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6. 6.




일생의 바람을 하나 꼽으라면 자연을 가까이에 두고 한적하게 여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서울 시내에 정착하는 것보다 쉬울 듯 싶지만, 따지고 보면 시골 생활에 필요한 것이 결코 그보다 만만해보이지는 않는다. 터를 마련하기 위한 금전적인 품은 적게 들지언정 오랫동안 머물기 위한 생활비를 마련할 기회가 서울에서보다 적을 것이다. 워낙 온라인으로 진행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어진 덕에, 예전에 비해서는 일거리 찾기가 수월해진 편이기는 하겠지만 그것도 특별한 재능을 지닌 이들의 이야기일 듯 싶다. 정착 문제만을 고려해도 서울에서 어지간한 비용을 마련해가지 않으면 오히려 서울에서보다 더 궁핍한 삶을 살 것이 빤해 보인다.


금전적 요소뿐만 아니라, 서울 생활과 멀어지는 것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바쁘게 진행되는 일상과 하나 건너 자리한 세련된 프렌차이즈 카페와 멀티플렉스는, 신물이 났다고 생각해도 막상 사라지면 어색하거나 불편할 수 있는 것들이다. 서울의 건조함을 견디기 위해 하나 둘 맛을 들인 입체영화와 자극적인 음식들, 세련되고 다양한 카페와 식당들, 예술 전시와 공연들은, 날을 잡아 작심하고 행동에 옮겨야 하는 행사가 될 수밖에 없다. 시골 생활은 마냥 평화로운 곳으로 삶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불편을 감수하고 대신 얻을 수 있는 가치에 집중하여 낯선 곳에서 새로 이 적응해야 하는 모험인 셈이다.


그러나 <들살림 월령가>에 실린 방등골 생활은 모험을 부추긴다. 15년차 푸드스타일리스트인 저자 양은숙은 서울에서 거리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지만 풍경과 생활 규모와 방식에서는 시골이라고 하기 충분한 용인의 방등골에서 3년째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음식에 관한 칼럼을 주로 쓰는 분이어서 이번 책도 요리 레시피 정도가 아닐까 싶어 주저했는데, 동경하는 시골 살림을 1년 간 기록한 소박한 글들의 묶음이란 것을 알고 설레며 읽을 수 있었다. 예쁜 우리말로 꾸며진 시골의 자연과 인심, 그리고 그 안에서 나누는 식재료와 음식에 대한 기록들이 워낙 싱그럽고 생생해서 눈 앞에 선연히 펼쳐지는 듯했다. 어느 곳에서든 장단점이 있기야 할 것이고, 시골에 간다해도 저자만큼 단아하고 야무지게 살림을 꾸릴 자신은 그리 없지만, 언젠가 꼭 시골 살림을 차려보겠다는 꿈은 한 뼘 더 자라게 되었다.


자연이라는 진통제의 효과는 아주 좋았다. 시속 백 미터로 걸으며 작고 낮은 것들에게 더 자주 더 오래 시선을 맞추었다. 어떤 날은 햇살 한 움큼에 부르르 떨며 뭔가에 홀린 듯 심장이 마구 뛰었고, 다른 날은 제비꽃 한 포기에 연애하는 기분이 들어 달뜨고 수줍고 발그레해졌다. (8쪽)


양손 가득 움켜쥔 비비추의 빛깔과 여린 촉감이 싱그러워서 마음이 두근거린다. 소담한 들꽃이나 들풀 다발을 보면 딸아이 결혼식 때 부케로 쥐어 주고 싶은 욕심이 발동한다. 순연한 초록 잎사귀로만 한 아름 묶어도 근사하고 제비꽃이나 감자꽃, 인동꽃이나 당귀꽃, 백일홍이나 함박꽃 등 계절에 피는 들꽃을 섞어 손에 들려주어도 아름답지 않겠는가. (28쪽)


멀리서 바라볼 땐 날씬한 모들만 살고 있는 듯해도 논고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또 다른 생존의 세계가 존재한다. 개구리는 일찍이 세를 불려 터줏대감 자리를 차지했고, 소금쟁이와 물방개는 달리기 전국체전에 대비해 맹연습 중이다. 클로버 잎을 새끼손톱만 하게 축소해 놓은 것 같은 개구리밥도 와글와글 단체 입주했고, 물옥잠은 보랏빛 꽃대를 올린다. (123쪽)


은행이 비싸다고 지청구 할 일이 아니다. 이토록 지난한 품을 필요로 하니 높은 몸값은 응당하다. 입이 심심하면 팬에 굴려 껍질을 벗기고 소금 한 꼬집 솔솔 뿌려 집어 먹는 맛이 꼬숩다. 단팥죽이나 떡국 꾸미로 몇 알씩 곁들이면 고급 음식의 완성이 되고 밥을 지을 때 한 주먹 솥에 던져 넣고 지어 먹는 은행 밥이 졸깃졸깃 거린다. 지인들과 한 움큼씩 나누는 재미는 얼마나 차진지…. 손 수고를 바친 알천이다. (231쪽)


서둘러 집에 다녀와야 할지 망설이는 내게 그는 이미 순두부 한 국자와 벽돌만 한 두부 한 모를 덥석 건넨다.
"다음에 주세요."
산책 나왔다가 얼결에 외상을 그어 버렸다. 끝자리 일원까지 바코드로 읽어 내 셈을 치루는 마트의 건조한 상거래 대신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시골 인심은 이처럼 순순하다. 땟거리가 마땅치 않았는데 마침 잘 되었다. (273~2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