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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읽지 "Book"/요즘 모읽지?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 배어있는 우울로 사실을 더한 여행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6. 27.




몇 차례의 치명적이고 운명적인 부주의와 의도된 것 같지만 아마도 비의도적일 심리적 구타로 병적인 자학을 일삼는 요즈음. 위로를 받으면 스스로 파악하고 있는 비루한 처지가 명백한 현실로 그려지는 것 같아, 위로조차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요즈음. 나 못지 않은 피해의식으로 쩔쩔 매던 내 또래의 여자가 서울을, 대한민국을, 모든 관계들을 훌쩍 떠나버린 여행담을 읽게 됐다. 생계와 경쟁의 압박으로 가득찬 서울을 도망치듯 떠난 봉현. 그녀는 베를린으로, 파리로, 산티아고로, 이집트로, 인도로, 끌어안고 있던 것을 하나 둘 씩 씻어내며 2년 동안 떠나온 곳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이 책은 저자 봉현의 정처 없는 여행기를 담은 책이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기획된 여행기는 아닌 것 같다. 그녀의 홈페이지(http://www.bonh.kr)를 보면 2010년부터 그녀가 작성해온 그림과 글로 기록된 일기들이 게재되어 있다. 아마도 그녀가 당시 작성한 것을 정리해 출간한 것이 이 책인 모양이다. 출간을 염두에 두고 기획된 여행기들은 정갈하고 체계적이다. 가장 깊은 이야기를 담게 되는 것이 일기라고 생각하기에, 마치 다듬어진 에세이처럼 '일기'를 보여주는 여행기를 보면 저자의 일상적 필력에 대한 놀라움을 느끼게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식을 마주한 듯한 불편을 준다. 이와 상반된 느낌을 주는 것이 봉현의 이 여행일기다.


봉현의 진솔한 여행일기는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서울로부터 멀어지던 길은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길로 이어져 있었다. 빤한 흐름이 인상적일 리는 없다. 이 책의 중요한 포인트가 될 그림 또한 아기자기하기는 하지만 장자끄 상페의 그림과 너무 닮아, 장자끄 상페의 작품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취향으로는 공감해도 호감을 갖기는 어려웠다. 정작 봉현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었던 이유는 여느 여행기보다 침울하고, 그만큼 극복의 과정이 안쓰러우며, 그덕에 기특하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희망과 설렘을 강요하는 긍정폭발의 세력에 함께 대항할 동지를 만난 느낌이랄까. 어렵게 겨우겨우 대한민국에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가는 그녀를 보면 어렴풋하게 나아지는 기분이 든다. 지금의 내게는 힐링이 됐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다시 낙담시키는 이야기보다 이편이 한결 위안이 된다.     


사람의 진심을 아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많은 말은 거짓을 지어낼 뿐이다. 사실 외롭고 쓸쓸한 순간은 혼자일 때가 아니라 많은 사람 속에서 내가 혼자임을 느낄 때였다. (59쪽)


끝에 도착해보니 그다지 다른 것도 없고, 보물도 없고, 그냥 내가 있을 뿐 아무것도 없더라. (162쪽)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구석진 방에 머물고 있다. 적은 양의 밥을 먹고 차를 한 잔씩 마시고 멍하니 산을 바라본다. 가끔 새들이 찾아와 남겨둔 빵 조각을 먹고 간다. 비가 오는 날이면 떠돌이 강아지가 와서 문을 두드린다. 동화 같은 이야기다. (319쪽)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3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