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기분을 내주는 책은 많다. 자신의 여행담을 적은 에세이, 여행의 에피소드를 주제로 한 소설, 여행 정보를 빼곡히 담은 여행 잡지 등등. 훈훈하게도 과장님에게 빌려 드렸던 책에 얹혀 온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는 여행을 주제로 한 소설이지만, 기존에 보았던 들뜬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보통의 여행 소설과는 차이가 있다. 끊임 없이 세상과 삶에 관한 생각을 이어나가며 깊은 산을 향해 여행하는 자부심 있는 화가를 화자로 하고 있어, 진지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긴다. '풀베개'라는 제목부터 자연을 침소로 삼는 것이어서, 이 소설에서 그리고 싶은 내용을 언뜻 이해하게 한다.
이러한 자연적 분위기는 주인공이 여행하는 목적이나 장소가 속세와의 연을 끊고 잇는 일과 닿아 있다는 점에서 한층 더 고조된다. 여행지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보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화자의 심리에 훨씬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다른 여행 소설과는 다른 점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인정'이라는 개념은 '속세' 내지 '세속'과 일맥상통하는데, 주인공은 이러한 인정에서 벗어난 '몰인정'을 추구하며 여행길에 오른 것으로 그려진다. 몰인정을 원하면서도 산속에서 만난 인정으로 인해 완전한 몰인정에 빠지지 못하고, 끊임 없이 예술의 역할과 몰인정에 대한 가치를 되뇌는 주인공의 의식은 나쓰메 소세키의 철학을 읽게 한다.
쉽지 않은 철학이 짙게 배어 있고 오래된 만큼 이제 와 읽기에는 평이하지 않은 문체로 쓰여져, 평범한 여행 소설을 읽을 때 기대하는 설레고 들뜬 기분을 느끼기에는 어렵다. 안개가 자욱하고 운치 있는 산속으로의 여행을 꿈꿔볼 수는 있겠으나, 어디로 향해야 할지 찾아야 하는 것도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이 소설 또한 여행 소설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니, 이러한 여행 소설 표면의 즐거움 안에 싸여 있던 심도 있는 여행자의 생각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로부터의 도피나 이상을 찾기 위한 탐색을 목적으로 여행을 떠나보았다면, 주인공의 생각을 면면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망망하고 엷은 먹빛의 세계를, 몇 줄기의 은전이 엇비슷이 달리는 속을 흠뻑 젖어서 가는 나를 나 아닌 사람의 모습으로 생각한다면 시도 되고 하이쿠도 된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잊어버리고 온전히 객관으로 눈을 돌릴 때 비로소 나는 그림 속의 인물이 되어, 자연의 경치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다만 내리는 비를 귀찮아하고, 발걸음의 피로함에 마음을 쓰는 순간은, 나는 이미 시 속의 인물이 아니며, 그림 속의 사람도 아니다. (20~21쪽)
방심과 천진함은 여유를 나타낸다. 여유는 그림에 있어서, 시에 있어서, 또는 문장에 있어서 필수 조건이다. 현대 예술의 일대 폐단은 소위 문명의 조류가 부질없이 예술가들을 구구하게 모든 곳에서 악착같이 집착하게 했다는 점이다. (103쪽)
여인은 사뿐히 일어섰다. 세 발자국이면 닿는 방 출입구를 나갈 때, 돌아보고 빙긋 웃었다. 한참 동안 망연자실했다. (131~132쪽)
선은 행하기 어렵고, 덕은 베풀기 어렵다. 절조는 지키기 쉽지 않다.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림은 애석하다. 이런 일을 감히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럽다. 이 고통을 겪으려면, 고통을 극복할 만한 즐거움이 어딘가에 잠재해 있어야 한다. 그림이라는 것도, 시라는 것도, 혹은 연극이라는 것도, 이 비참함 속에 깃들어 있는 쾌감의 별칭에 불과하다.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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