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지극히 세속적인 고민과 함께 달달이 연명하고 있는 월급쟁이지만, 2년 전까지만 해도 순수인문학 전공자로 현실에 발을 디디려 부단히 노력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철학이 깃든 예술이며, 그 예술이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님을 피력하기 위해 구석구석을 뒤져 단서를 구하곤 했다. 그럴싸한 것을 찾을 때면 기뻤지만, 흔한 20대의 얼굴을 한 친구들의 걱정에 휘둘리지 않으려, 발견한 단서를 썩어가는 동앗줄을 잡듯 가까스로 움켜쥐어야 했다. 몇 밤을 자도 잊히지 않을, 나 자신부터 완벽히 설득할 단서를 끝내 찾지 못했기에, 나는 스스로의 재능과 학구열이 부족하다는 자조와 함께 인문학의 흔적이 희미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돈을 버는 대부분의 일이 남의 장단에 맞춰 마음을 낚아챈 후,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가져가도록 홀리는 것 아닌가. 진심에서 우러난 마음이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억지로 혹은 공으로 줄 수 없으니 일부러 비위를 맞추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깃들어 있는 것이 돈 버는 일 아닌가. 애초에 연구소에 취업하지 않은 이상 이런 가식적인 인간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예견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전에 꿈꾸던 철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을 품을 수 있을까. 마음 한 켠에는 그러한 것들이 허황되지 않았다고 믿기 위해 단서를 찾던 일이 어쩌면 자기합리화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의 현실에서도 이상적 담론들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고 여전히 나는 책에서, 영화에서 겨우겨우 단서를 찾고 있다.
이때 마침 과거의 열정으로부터 회신이 오듯, 그 당시 처음 보았던 시인 심보선이 <그을린 예술>이라는 산문집을 통해 누구에게서나 예술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도 역시 시인이면서 사회학자로, 한편으로 지극히 예술적이면서 또 한편으로 누구보다 현실에 닿아있는 사람이기에, 나와 비슷한 고민을 더 오래 숙성하여 해왔던 듯하다. 그의 시와 글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이 인정해준 학력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 나보다 훨씬 스마트한 사람인 그는, 예술과 세속적 삶의 연결에 더욱 확신을 갖고 있다. 그가 제시한 단서도 요약하고 보면 결국 모든 사람의 삶에는 그가 사회를 대하는 진정성을 토대로 예술이 피어날 수 있다는 것으로, 현실에 입각한 대중적 예술에의 주창이기는 하다. 그의 글을 읽고 생각해보면 현실을 평범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예술을 통한 희망을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답일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내가 붙잡아오던 단서가 뚜렷해지는 느낌이다.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는 그 답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될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세계와의 불화'라 불리곤 했던 청춘의 태도와는 오래전에 이별을 고한 채, 물리적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존재의 유일한 목적인 원자 알갱이처럼 열에 들떠 분주하게 살고 있었다. (22쪽)
우리가 만약 우정과 약속이라는 관점을 고집한다면, 단지 개인의 근사한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이직과 커리어 전환을 지칭했던 환승이라는 말은 새로운 현실성을 띠게 될 것이다. (42쪽)
나는 지금까지 어떤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의 어떤 우정에 대해 쓰려 했다. 어떤 익명의 얼굴들, 기이한 인연들에 대해 말하려 했다. 그것들은 현현하는 것이다. 어떤 변수, 배경, 원인들의 재현이 아니라 만남 그 자체의 무목적적인, 그러나 신비로운 현현. 첫 번째이자 마지막 매듭, 맨얼굴, 뜻밖의 목소리, 이미 소멸된 추억으로부터 오기도 하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로부터 오기도 하는 그것들. 그것들은 현재에 도달하여 현재를 충만하게 만든다. (89쪽)
창작자는 언제나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창작자는 자신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으로 '나누어지기'를 원한다. (196쪽)
말라르메나 노동자, 등단한 시인이나 등단하지 않은 시인 그 모두에게 창작에 필요한 시간과 장소는 여분의 것이 아니라 초과의 것이다. (217쪽)
아마추어는 프로와 다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작품의 질이 떨어지거나 기예의 숙련도가 떨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제도 바깥의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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