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영화관 화장실에 새까만 종이에 'World War Z, Brad Pitt'라고 쓰인 것을 보고 흥분하며 예고편을 찾아 봤었다. 그 뒤로 영화관 대형스크린에서 끊임 없이 재생되던 예고편 또한 기대를 높였다. 그러다 홍보를 너무 거창하게 하는 것을 보니 뭔가 거품인가 싶기도 하고, 브래드 피트 아들이 원작소설을 좋아해서 꼭 찍어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나니 이거 애들 취향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됐다. 기대작은 참지 못하고 첫 주에 보곤 하는데, 왠지 실망할 것 같아 미루다 보니 개봉 다음 주인 어젯밤에야 보았다. 기대를 버렸다고는 하지만 금요일 밤의 영화관이라니, 좀비영화에 잘 어울리잖아.
일을 그만둔 아버지 제리(브래드 피트 분)의 팬케이크로 아침식사를 한 단란한 가족이 룰루랄라 집을 나선다. 스무고개 한 판 했는데 이게 평화의 끝. 시작부터 긴장감 폭발하는 속도전 속에서 좀비가 등장한다. 끝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달려와주는 좀비떼. 유리깨기, 매달리기, 벽타기, 골목뚫기, 의자넘기 등 장애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브래드 피트도 나오는데 B급 영화 속 좀비의 비주얼은 아닐 거라고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말끔하다. 피 튀기는 장면도 드물고 뜯어 먹고 자르는데도 혐짤이 없다. 그저 상상하니 무서울 뿐. 세겐(다니엘라 케르테스 분)의 팔에서도 딱히 붉어지지 않고, 제리가 허리에 박힌 안전벨트를 못 뽑는 것을 보며, 이 영화의 수위조절을 확신할 수 있었다. 피트 애도 보여줘야 하니 현실적으로 피가 솟는 장면을 만들지는 못 했겠지. 적어도 이 영화는 '빠른 좀비떼'로 기억될 것 같다.
덜 잔인하고 비현실적인 좀비 영화라서 실망스럽지는 않다. 약간 아쉬운 감은 있지만 굳이 보고 싶지는 않기에 오히려 만족스럽다. 심지어 연구실에서 만난 좀비들은 꽤 귀엽기까지 하다. 원래 좀 배웠던 애들이라 그런지, 의복이 산뜻해서 그런지. 헤어나올 수 없는 캐릭터를 가진 좀비들에 빠져, 영화를 보고 나와서 턱을 들고 이를 딱딱딱 부딪치며 초점없는 눈을 크게 뜨는 좀비 코스프레를 했다가 핀잔을 좀 들었다. 멈추지 않고 각기춤까지 췄다가 냉대 받음. 원래 각기가 고난이도라고는 하지만 관절 몇 번 꺾었다고 죽겠더라. 보면서도 느꼈지만 좀비 연기하는 사람들 연기력이 엄청나다. 휴면상태 좀비들은 진짜 각기춤만 계속 추는데 브레이크댄서들이 따로 없다. 표정 연기도 다들 대단하지만 몸연기가 압권이다. 피트 아들도 카메오로 좀비 출연했다던데 좀 배웠나 모르겠네.
긴장 조절이 깔끔하고 주기적으로 공포를 느낄 수 있어서 집중하며 볼 수 있었지만, 전반적인 스토리는 아무래도 시시하다. 원인 규명보다 대응에 급급한 현실을 잘 그려내긴 했지만 세련되거나 극적으로 그리지는 못한 것 같다. 다만 전반적인 내용이나 설정들은 원작소설의 역할이었을 것이기에, 거대한 스케일과 넘치는 긴장감을 가득 실어준 것만으로도 좀비영화로서의 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미국 풀숲에서 불 끄고 촬영하고 평택이라고 사기 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던 평택 장면을 빼면 연출도 딱히 거슬리는 게 없었다. 더군다나 배우들의 연기도 빛을 발했다. 브래드 피트야 또 말하면 지겹고, 좀비들의 연기는 아까 언급했고. 많은 사람이 주목할 것 같지만, 이스라엘 여군 세겐 역을 맡은 다니엘라 케르테스의 카리스마가 상당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어릴 때 보았던 <지.아이.제인>의 데미 무어가 겹쳐 보였다. 음악, 특히 테마곡 또한 금요일 밤에 어울리는 들썩들썩 신명나는 사운드였다.